내 고향은 가랑비나 진눈깨비가 살짝만 날려도 버스가 오지 않는 오지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전기가 들어왔고, 형광등이 너무 밝아서 놀랐다는 말을 하면 누가 믿을까 마는 사실이었다. 그런 시골임에도 포도 맛을 보기가 어려웠다. 모교인 삼기국민학교 교가 “고려산이 굽어보네, 공부 잘하나, 즐거운 노랫소리, 책 읽는 소리”에 등장하는 고려산의 야생 머루가 그나마 거봉의 아쉬움을 달래줬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머루는 알이 너무 잘아서 서운하고 더 조바심 나게 만들었다. 거봉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날은 추석 바로 전 주말이었다. 박찬종 변호사를 닮은 먼 일가 어르신께서 벌초를 오면서 거봉 한 상자를 들고 왔다. 그때 맛본 입장의 거봉 포도는 소년의 동공을 풀리게 할 정도로 과즙이 많고 굵으면서도 달았다. 지금도 경부고속도로 입장 포도밭을 지날 때면 어릴 적 생각이 스윽 스친다. 거봉의 추억이다. <기적의 자연재배, 송광일 저, 현재 절판> 송광일 박사는 한국농업의 스티브 잡스라 불린다. 그와의 인연은 2013년<기적의 자연재배>라는 그의 저서를 읽고 무투입 농사를 지으면서 시작됐다. <자연재배를 위해 땅을 만드는 두 아들, 2014년 충남 전의> 2018년 처음으로 잡스 형님을 만났을 때 그의 인상은 특이했다. 피부과에서 리프팅 시술을 받았나 싶을 정도로 얼굴 근육과 눈꼬리가 올라가 마치 살아있는 하회탈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연재배 파프리카 발효 원액을 구하러 간 우리 일행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저희는 주름개선용 화장품에 필요한 우리만의 물질을 찾고 있습니다. -(대뜸 다 안다는 듯)사업 이야기는 찬찬히 허시고 멀리서 오셨으니 밥부터 먹으러 가지요. 밥이 얼마나 중요하냐면요, 바븐... 모~든 거슬 제자리로 찾게 해줌다. -아직 시간이... 운전대를 쥔 송드라이버는 야수로 돌변했다. 그는 좌우로 핸들을 격하게 틀었고, 급브레이크를 주저없이 밟았다. 그게 그날 고난의 서막이었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뒷좌석의 우리는 손잡이가 철봉인 양 매달린 채 브레이크를 연신 헛 밟았고 비명을 삼켰다. 금방이라던 식당은 광주 시내를 관통하고 40분이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그날 도축한 한우만을 판다는 무시무시한 식당에는 아직 손님이 없었다. 동물권을 생각해서 ‘채식이나 비건 식당으로 가시죠’라는 말은 기세에 눌려 하지 못했다. -고기는 생으로 먹어야지, 100도 이상 화식은 좋은거이 아녀어-.....(생간을 보며 상념에 빠진 나를 지켜보던 잡스, 잠시 후에)-어이 동상, 동상은 생고기 몬 먹능가아?-아뇨오!..네...아뇨?... 한국농업의 스티브 잡스는 소주 여섯 병을 매잔 완샷으로 꺽었고 난 잔을 채우느라 바빴다. 그 사이 사이에 자연재배의 원리, 고전압과 저전압, 서구과학의 오류 등 갖가지 가설과 주장을 쉴틈없이 쏱아냈다. 식탁 위의 생고기, 탕, 반찬, 국물, 떡국 추가까지 마치 며칠을 굶은 사람처럼 그는 식판을 싸아악 쓸어버렸다. 그날 같이 간 착한 정 모 선배는 여섯 시간 이상 화장실 갈 기회를 찾지 못하고 안색이 흙빛으로 차 올랐고, 다리가 긴 나는 책상다리와 무릎 꿇는 자세를 반복했지만 다리가 저려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결국 노래방까지 가서 한 분은 가수 진성의 ‘안동역에서’를, 송박사는 이름 모를 트로트를 가곡과 판소리가 합쳐진 듯한 생경한 창법으로 아주 높은 거봉까지 도달한 후에 기진했다. 끝내 SRT를 놓친 우리는 딱딱한 박사님 연구소에서 예정에도 없던 일박을 청해야만 했다. 지금 생각해도 긴 하루였다. <절정으로 가는 송박사, 2018년 광주 노래방> 송박사의 자연재배 포도 농장에 가보면 신비한 미스테리가 있다. “잡초가 자라지 않는다는 점, 물을 거의 주지 않아서 땅이 돌덩이 같이 딱딱하고 건조하다는 점, 경운을 하지 않는다는 점, 퇴비를 주지 않는다는 점 그런데 그런 악조건에서 나무가 자라고 과일이 달린다”는 게 그것이다. 또 하나, 포도가 썩지도 않는다. 이걸 과학으로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썩지 않고 마르는 1년 전 자연재배 포도, 2020년 송박사 농장> <송박사 포도밭 토양의 모습1> <송박사 포도밭 토양의 모습2> 방송다큐멘터리에서도 다뤘지만 송박사의 밭은 질소성분이 일반 토양의 1/20 수준이다. 전남대 김길용 교수는 일반적으로 작물이 자랄 수 없는 수치라고 말한다. 하지만 다음 화면은 잘 자라고 있는 가지밭이 보여진다. 이런 점이 그가 주창하는 서구과학의 한계를 말하는 것인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SBS스페셜-생명의 선택, 다음 천 년을 위한 약속, 2009년> 송박사는 과수의 맛과 영양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리기 위해 물을 인위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시설 자연재배를 선택했다. 그렇게 재배한 포도는 품종마다 차이는 있지만 보통 23브릭스 이상의 높은 당도를 자랑한다. 설탕을 넣지 않고도 자연발효가 돼 와인을 만들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인위적인 호르몬 처리(지베렐린)를 하지 않아 씨가 씹힌다. 완숙상태에서 수확함으로 배송시에 알 떨어짐이 발생할 수 있다. 농약, 비료, 퇴비, 인공적인 투입을 하지 않아서 상대적으로 알이 작다. 상온에서 먹어야 더 맛있다. 포도 본연의 맛에 가장 가까운 자연재배 포도는 땅을 살리고, 나를 살리고, 지구를 살린다. <평균 23브릭스 이상의 자연재배 포도> <송박사의 자연재배 거봉> from. 쿠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