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려. 기다릴 줄 알아야 최고로 맛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어.”-영화 <리틀 포레스트> 中 언제부턴가 ‘제철’을 잊었다. 불 꺼지지 않는 도시에서는 손만 뻗으면 먹을 것이 넘쳐났고, 지구 반대편 먹거리도 새벽이면 집 앞에 도착했다. 그렇게 ‘음식의 홍수’ 속에 천천히 입맛을 잃어갔다. 수험생과 취준생, 직장인을 거쳐 가며 시간마저 빈곤해졌다. 맛있는 걸 먹기보다 ‘때울’ 때가 많았고 아침보단 늦잠을, 끼니보단 야식을 선택해갔다. 입맛이 없으니 요리하는 기쁨을 알까. 나에게 요리란 나가기도 귀찮은데 사 먹을 돈은 없고 시간만 있을 때 겨우 할까 말까 고민을 시도하는 생존 수단에 불과했다. 음식에 돈을 쓰기엔 갖고 싶은 옷과 구두가 너무 많았으니까! 음식만큼 넘치는 게 젊음이었던, 맛집에서 먹겠다며 몇 시간씩 줄 서는 남자는 번호도 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네가 먹는 것이 너를 정의하리라 “옛날보다 흉악범죄가 늘었다고들 하잖아요? 역학조사를 한번 해봤으면 좋겠어. 그들이 어렸을 때부터 뭘 먹고 자라왔는지.” 서울에서 전주까지 기차로 1시간 50분, 다시 차로 30분. 새벽 기차에 몸을 실을 때만 해도 몰랐다. 두 시간 반 뒤, 해발 380m 진안고원 산기슭 한 농막에서 자기반성을 하게 될 줄은. 이곳은 전북 진안의 ‘깊은샘블루베리’ 농장. 꾸지람 아닌 꾸지람의 주인공은 ‘낭만 농부’ 김영일 씨다. 호리호리한 체형과 카랑카랑한 목소리. 그의 첫인상은 ‘농부’와 다소 거리가 있었다. 농부의 관상이 따로 있는진 몰라도, 학자를 닮은 눈빛과 한 멋쟁이 했을 것 같은 풍류가 그러했다. 고향으로 귀농하기 전 직업을 물으니 아니나 다를까, 도시에서 반평생 건축가로 살았단다. “진안에서 초등학교를 일찍 졸업하고 도시로 유학을 떠났어요. 45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거지. 부모님이 농사를 지으셨지만, 11살에 고향을 떠났으니 농사 경험은 전무했다고 봐야죠. 사실 건축가는 정년 없는 직업이거든. 근데 언제부턴가 내가 고집하는 디자인이 젊은 사람들한테는 맞지 않는기라. 후배들은 막 치고 올라오지, 반평생을 하니 권태기가 오더라고.” 참 열심히 살았건만, 어느 날 문득 인생을 되돌아보니 ‘나는 없었다’는 김영일 농부. 허전함을 달래려 대형서점을 찾았고, 거기서 피에르 베일(Pierre Weill)의 <빈곤한 만찬>을 처음 만났다. 피에르 베일은 농업생산방식과 건강의 상관관계를 연구하는 프랑스 농공학자다. “제목부터 쇼킹한데 내용은 더 쇼킹해. 요즘 오메가3 다들 챙겨 드시잖아. 오메가3는 지방 축적과 이동을 억제하고, 오메가6는 지방 합성을 돕지요. 둘 다 심혈관계, 내분비계, 면역계에 개입하는 필수지방산인데, 오메가6와 오메가3의 이상적인 비율은 5:1이에요. 그런데 현대인은 오메가6를 평균 20배 이상 더 섭취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오메가6가 주로 어디에 많으냐. 바로 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sm·유전자 조작 식품)라는 거죠.” 물고기 유전자를 토마토에 집어넣고, 인간 유전자를 담배에 집어넣는 유전자 조작. 피에르 베일은 GMO를 만드는 과정이 결코 과학적이지 않다고 역설한다. 더불어 GMO가 우리에게 치명적인 알레르기를 유발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오메가3를 먹으려 애쓰지 말고 오메가6를 줄이면 되는데, 오메가6를 실컷 먹고 오메가3도 따로 챙겨 먹는 현대인의 식습관. 김영일 대표는 GMO를 공부할수록 ‘사람이 먹으면 안 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와 일본이 GMO 수입국 1위를 번갈아 탈환하는 사실에 놀랐다. 하나하나 파헤칠수록 먹을 게 없었다. “그러니 어째, 내가 직접 지어 먹어야지. 그래서 GMO를 탈피한 농사,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자연농’의 길을 걷기로 했어요. 그럼 뭘 기를까, 고민하는데 당시 진행하던 현장 맞은편에 유기농 블루베리 농장이 있더군요.” 아이도 작물도, 강하게 키워야지 10년 전만 해도 블루베리는 생소한 과일이었다. <뉴욕타임스>가 ‘세계 10대 슈퍼 푸드’로 선정해 국내에 막 알려질 때였다. 맛은 밍밍해도 약으로 먹는 과일인 줄 알았건만, 그 농장의 블루베리는 맛과 향이 남달랐다. 농장주에게 ‘농사지을 관상이 아니다’란 말까지 들어가며 출석 도장을 찍은 끝에, 그 차이가 ‘품종’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시절 대다수 블루베리 농장에선 많이 열리고 빨리 따고 크게 열리는 ‘듀크’를 심었어요. 이 품종이 당도가 떨어져서 맛이 좀 밍밍하거든. 그런데 이분은 미국·캐나다에서 삽목한 종자를 공수했으니 맛이 다를 수밖에.” ‘수확량이 적더라도 질 좋은 것을 심는다’는 김영일 농부의 철칙은 여기서 비롯했다. 처음엔 서울 근교에 텃밭을 일굴 생각이었지만, 부모님의 부탁으로 옛날에 사둔 고향 땅이 떠올랐다. 부모님께서 틈날 때마다 정성껏 골라두신 자리. 그 정성이 아까워 주변 땅을 추가로 매입해 터를 마련한 것이 깊은샘블루베리의 시작이다. 산비탈을 개간한 탓에 제법 경사진 땅에 단단히 뿌리 내린 블루베리 나무만 약 2000그루. 30여 종의 품종이 골고루 섞인 블루베리가 제철을 맞아 한껏 쪽빛 열매를 뽐낸다. 농막 창문 너머로 마늘, 들깨, 팥, 고추 등 갖가지 채소가 심긴 텃밭이 보인다. 텃밭 가장자리엔 화분에 심긴 블루베리 묘목과 이름 모를 꽃이 올망졸망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 사이로 꿀벌 수백 마리가 꽃과 벌통을 바지런히 오간다. 농장 꼭대기에는 600마리의 닭과 병아리가 활개 치는 자연방사형 닭장이, 길 너머엔 논 3000평까지…. 총 1만2000여 평에 달하니 그 규모가 절대 작지 않다. “블루베리를 이 정도 규모로 하는 자연농이 한국에는 없을 거예요. ‘온실 속 화초’란 비유가 있죠? 내가 아들이 둘인데, 사교육 하나 없이 키웠어요. 작물도 자식이랑 똑같아요. 강하게 키워야 합니다. 우리 블루베리는 농약과 비료는 물론, 물도 따로 주지 않습니다. 물을 찾아 뿌리를 깊게 뻗으니 튼튼하고, 가물어도 이슬 먹고 버텨내는 능력이 있지요. 그렇게 열심히 맺은 열매들이니, 그 맛이 얼마나 각별하겠습니까.” 앉은 자리에서 평생을 사는 식물이 동물보다 수백 년을 더 오래 산다. 산에 있는 나무들은 혹한 겨울과 뜨거운 여름을 혼자서도 잎 푸르게 버텨낸다. 김영일 농부는 이처럼 식물의 타고난 ‘자생력’을 인정했다. 그저 맑은 물만 있으면 잎과 줄기가 깨끗한데, 여기에 빨리 크라고 비료와 퇴비를 주는 건 아이를 비만과 성인병에 시달리게 하는 것과 같다고 봤다. “식물도 잠을 잡니다. 다년생 작물인 블루베리를 예로 들면, 영상 7도 이하로 떨어질 때 수면기에 들어가요. 그런데 일부러 온실을 만들어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한단 말이죠. 애들 각성제 먹여가며 잠 안 재우고 학원 보내는 부모랑 뭐가 달라. 목적은 돈이야. 남보다 먼저, 많이 생산하면 비싸게 팔리거든. 농부라면 식물이든 사람이든 생명을 살려야지, 나 살자고 남을 죽이면 안 되잖여.” 음식은 ‘기다림’이야 “부지런히 따서 드셔. 여기 오시면 배 터질 때까지 블루베리 드셔야 해.” 칠레산 블루베리만 먹던 내가 탐하기엔 그 노고가 아까웠다. 선뜻 손 내밀지 못하는 내게, 김영일 농부는 심심하면 블루베리를 한 움큼씩 따서 건넸다. 노스랜드, 노스블루, 레카, 엘리자베스, 블루타, 루베리…. 이름도 예쁜 아이들이 입안에서 톡톡 튀었다. 누가 블루베리를 밍밍하다 하였나. 새콤하기가 짓궂은 소녀 같고, 달콤하기가 막 사랑에 빠진 청년 같다. 여리디여린 눈록빛 열매부터 분홍과 자색이 섞인 녀석, 짙은 남색으로 농익은 것까지…. 한 가지에서 났어도 상태가 제각각인 블루베리를 보자니 저마다 개성 강한 남매를 보는 것 같았다. 어쩜 이리 예쁠까. 어쩜 이리 장할까. “이게 그저께 딴 블루베리예요. 일반 블루베리는 이렇게 탱탱하지 않아. 입에 넣는 순간은 맛있을지 몰라도, 자연농 블루베리처럼 긴 여운은 없어요.” 가정에서 올바로 자란 아이들이 최소한 남에게 폐를 끼치진 않듯이, 바른 먹거리가 바른 인성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김영일 농부. 그에게 음식은 ‘기다림’이다. 그로 인해 ‘바른 먹거리’에 대한 기대치가 조금이라도 높아진다면, 유기농인증제처럼 ‘자연농인증제’가 도입돼 선택의 폭이 넓어질 수 있다면, 정직하게 흘리는 땀이 힘들지 않다. 김영일 농부는 올바른 먹거리를 알리고자 8년째 ‘맛 콘서트’를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프랑스대사관 총주방장이자 프랑스 가정식 레스토랑 ‘르 셰프 블루’를 운영하는 로랭 달래 셰프가 그 파트너. 한 달에 한 번, 20명 정원으로 프랑스 정찬을 맛볼 수 있는 이 행사를 위해 김영일 농부는 식자재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로랭 달래 셰프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요리와 장소를 제공한다. ‘한국의 옛날 닭 맛을 보여주겠다’는 제안에 농장을 직접 방문한 로랭 달래 셰프는 가격을 묻기에 앞서 비디오카메라로 닭 먹이를 담고, 도축한 닭의 내장 상태를 체크했다. 좋은 요리를 위해 재료를 꼼꼼히 확인하는 그의 태도에서 ‘한 수 배웠던’ 날이었다고. “토마토를 먹으려면 150일 동안 햇볕을 받아야 해요. 그런데 스마트팜은 이걸 60일 만에 가능하게 하지요. 겉모양은 비슷할지 몰라도 맛과 영양은 못 따라가죠. 여러분이 먹는 치킨? 밀폐공간에서 밀집 사육해서 28일 만에 내보내는 닭이에요. 좋은 거나 먹이면 몰라, GMO 옥수수, 항생제, 성장촉진제…. 그런데 소비자는 무항생제 무농약을 믿어. 기준치 이내란 소리지, 정말 ‘무’가 아니에요. 출하 1주일 전에 항생제 끊으면 무항생제 되는 거예요.” 무항생제 고기, 동물복지 달걀을 먹고자 지불했던 나의 ‘웃돈’들이여. 닭의 본래 수명이 25~30년이란 것도, 최소 2년 이상 살아야 뼈가 단단해진다는 것도, A4용지 한 장 사이즈 주는 게 ‘동물복지’란 것도 오늘에서야 알게 됐다. 이쯤 되면 ‘치킨의 반란’ 아닌가?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길, 나는 또다시 수많은 음식을 만났다. 무더위를 달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편의점 짝꿍 초코우유, 허기진 날 향해 손짓하는 기차역 샌드위치, 소주를 부르는 돼지고기 김치찜…. 이 음식은 어디서 왔고,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나는 앞으로도 도시에 살며 내 오장육부를 여전히 괴롭힐 것이다. 먹는 것을 일일이 따지기엔 시간이 빈곤하고, 공장식 농산물이 세상을 아직 세상을 지배하고 있으므로. 그러나 적어도 선택권이 생길 때마다 바른 재료를 쓰는 레스토랑을, 천천히 키운 농산물을 고를 것이다. 키우는 사람이, 고르는 사람이 올바른 방향을 선택한다면 세상이 바뀌리라 믿으면서. 언젠간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처럼, 밤 조림으로 가을을 느끼고 곶감으로 겨울을 맞이할 행복이 내게도 오길 바라면서.